에세이
딸깍, 당신의 B면을 들어보실래요?
한연희 · 2024. 10. 23.

1개의 커다란 서랍 속을 가득 채운 카세트테이프들.
20년도 더 된 그 오래된 그것이 나는 참 좋다. 잘 챙겨왔기 때문에 이사를 몇 번이나 하면서도 지금껏 파손 없이 잘 남아있는 게 가끔 뿌듯하기까지 하다. 옛날 물건은 버리면 그만인 21세기에 되려 역행하는 기분이라 그게 위안이 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테이프의 쓸모를 찾아주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음. 그나마 2년 전 지금은 사라진 독립서점에서 선별한 테이프들을 챙겨와서 열심히 듣던 때가 있기도 했었지.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다시 테이프들은 서랍 속에 갇혀 침묵하게 만든 장본인이 나이지만 말이다. 잠시 내가 너무 음악의 영혼을 버려둔 게 아닌지 급 죄책감이 밀려오는 가운데 지금은 서랍 속을 뒤적이는 중이다.
음악을 좋아했던 고등학생 시절, 용돈을 모아 한 달에 한두 번꼴로 학교 앞 음반 가게로 달려가 샀던 나의 소장목록들이 보인다. ‘여행스케치’에서부터 ‘핑크 플로이드’까지, ‘에디트 피아프’에서부터 ‘솔리드’까지. 누군가 들여다보면 음악 취향을 도통 알아먹을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목록들이지만, 정말 그 당시에는 1세대 아이돌이라 불리는 HOT나 젝스키스보다는 나만의 음악적 취향을 가진 것이라 자부할 수 있는(?) 것들이 거기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손글씨로 목록을 일일이 작성하고 꾸민 녹음된 테이프를 꺼내 든다. 영화음악 1번이라고 적힌 테이프 케이스를 열어보니 <사랑은 비를 타고>를 시작으로 <파리넬리>로 끝나는 영화 제목과 OST 음악 제목이 적혀있다. 이런 녹음테이프가 13개나 모여 있다. 그 당시 나를 버티게 해준 것 중 하나가 영화음악 라디오였는데……. 모든 채널에서 영화음악 채널만 골라 빠짐없이 듣던 때였고, 지금보다 더 영화를 좋아하던 시절이었는데……. 이런저런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역시 음악은 추억을 만들어내는 예술 장르가 맞구나 하면서. 테이프의 겉면을 만지고 목록을 살핀다. 라디오를 들으며 듣고 싶던 음악이 나올 때마다 재빨리 버튼을 누르며 하나하나 녹음하여 만든 나만의 일종의 핸드메이드(?) 테이프들. 그중 하나를 들어본다. 최근에 구한 중국제 투박한 카세트 플레이어에 넣어 들어보니 정식 음반들보다는 음질도 나쁘고, 꽤 많이 손상된 소리가 난다. 그래도 어쩜 이리 추억 돋는 영화와 음악인지, 잠시 앉아 줄 이어폰으로 음악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영화가 있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본 그 영화는 내게 많은 위로를 준 영화 중 하나였다. 특히 조니 뎁의 배우와 그의 연기에 빠져들었던 시기였던 지라 영화 보는 내내 눈물 콧물 흘렸던 기억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어리고 풋풋한 조니 뎁 뿐만 아니라 장애 연기를 보여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어린 시절 또한 볼 수 있는 영화인데, 넷플릭스에 영화 목록 중에 찾아볼 수 있어서 내심 반가웠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의 이 테이프에 녹음된 곡은 마지막 엔딩에 흘러나오던 대사와 함께 흘러나오던 음악이었다. 험난한 가족사를 잘 마무리 하고 새롭게 길을 떠나게 되는 길버트와 동생에게 어울리는 조금은 희망적인 느낌. 그래서 참 다행인 결말. 괜히 길버트에게 이입되었던 나는 어떤 고난이 있을지라도 길버트는 잘 해내리라 믿고, 나 또한 어떤 미래가 닥칠지 모르지만 잘 한번 나아가보는 거라 마음먹었던 것 같은데, 벌써 이후 20년도 흘러왔다. 그런데 지금의 나, 잘살고 있는 것 맞겠지? 여전히 불투명한 미래이지만, 기후 위기니 온갖 사회문제니 먹고 살 문제까지 온통 걱정인 세상이지만, 그래도 음악을 들으니 다시 위로되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 테이프가 눈에 띈다. <접속> OST 앨범.
이 당시엔 우리나라 영화음악 중에 진정한 OST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 때였다. 그래서 이 앨범이 매우 주목받았고, 그만큼 좋은 곡과 영화 자체를 느낄 수 있는 앨범으로 여전히 현재에도 매체에서 가끔 언급하는 것 같다. 영화 속 주인공 목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있는 앨범은 그전에는 없던 일인지라, 앨범 전체를 듣는 동안 영화 한 편을 다시 귀로 듣는 기분이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다시 들으니 또 새록새록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구나.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지나가는 여인1, 여인2.”이라고 읊조리는 앳된 듯한 전도연 배우의 목소리. “쉽게 구겨지지 않아서 좋다” 말하는 한석규 배우의 웃음이 묻은 목소리. 그 부분에서는 마치 추억의 서랍 속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그 장면을 틀어놓은 것 같다.
그리고 A면 마지막 순서에 이르면 The Velvet Underground의 “Pale Blue Eyes”가 나온다. 이 곡은 내게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밴드를 알게 했고, 이 장르 음악에 빠져들게 한 곡이기도 한데, 역시나 참 좋다. 왠지 영화 속에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무언가 매혹적으로 빠져들게 해 큰 정서적 울림을 준다. 결국 관계가 어긋나고 마는 주인공의 내면을 이 선율이 다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영화음악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지 하면서 저절로 수긍하게 된다. 그다음 테이프 한 면이 다 돌고 나면 딸깍 소리에 재생 버튼이 올라오고 멈춘다. 음악은 자동으로 다음 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반대쪽을 돌려야 하는 수고로움을 동반해야 A면이 아닌 B면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곡이 시작된다. ‘Yesterday is here’의 우울한 선율과 Tom Waits의 중저음 목소리. ‘오늘은 회색 하늘, 내일은 눈물, 어제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예요.’라고 읊조리는 음악. 이것이면 됐다. 시가 따로 없다.
90년대 문화에는 그저 추억만을 되돌아보게 되는 게 아닌 잠시 멈춤의 세계가 있는 것 같다. 영화 <접속>의 내용 속에서도 PC통신으로 이어지는 만남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빠르게 연결되었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 아닌, 그래서 느리고, 불편하고, 어긋나고,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있다.
요즘 20대분들이 아날로그와 빈티지를 찾는다고 해서 다시 90년대 문화가 주목받는 중이라고 하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그저 디지털 세상과는 영 친해지지 못한 사람일 뿐인지라, 덕분에 어쩌다 보니 힙한 것에 손을 대는 모양새가 되었다. 빈티지 카메라도 그렇고, 구제 옷도 그렇고, 오래전 물려받은 엄마의 코트도 그렇고, 누렇게 바랜 책들과 구멍이 숭숭 뚫린 신발까지. 오래된 것들이, 그래서 나의 손때가 묻은 것들이, 누군가의 영이 깃들어 있을지 모를 그런 사물들이 주변에 계속 있었다. 그렇기에 무조건 나는 그것이 좋다. 음악은? 왜 아니겠는가? 고전이라는 것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테이프를 바꿔 듣는다. 이번엔 ‘신중현’이다. 와, 세상에나. 2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이렇게 세월이 흘렀음에도 취향은 정말 한결같구나. 너무나 좋다. 이것이면 됐다. 진심으로!
그러니 당신에게도 남아있을 B면의 느리고 아날로그적인, 그래서 지금과는 무척 이질적인 부분을 찾아 한번 들어보심이 어떨까요?
한연희 / 시인
시를 씁니다.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두 권의 시집이 있습니다.
지구에서 소수의 다른 생명과 함께 오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